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닌의 난 (문단 편집) == 본격화된 전쟁 == 5월 26일, 소젠 저택의 남쪽에 있던 이치조 오미야(一條大宮)의 호소카와 가쓰히사(細川勝久)의 저택을 시바 요시카도의 부하인 아사쿠라 다카카게, 가이씨 등의 서군이 쳐들어갔다. 응전한 호소카와군과 격전을 벌였고 동쪽에서 원군으로 온 교고쿠 모치키요(京極持淸)를 거꾸로 물리치기도 했다. 거듭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남하해 오오기마치(正親町)를 지나 이노쿠마(猪熊)를 치고 시바씨의 군을 끌어들이자 호소카와 가쓰히사는 그 틈을 타서 동쪽의 호소카와 시게유키 저택으로 달아났다. 가쓰히사의 저택을 불살라버린 서군은 거듭 시게유키의 저택으로 쳐들어가 스모노데라(雲の寺), 햐쿠만벤(百万遍)의 불전, 혁당(革堂)에도 불을 질러가며 시게유키의 저택을 공격했지만, 동군의 저항으로 결착이 나지 않고 다음 27일에 양군은 물러났다. 이 전투로 북쪽은 후나오카 산(船岡山), 남쪽은 니조 대로까지 타버렸다. 쇼군 요시마사는 28일에 양군에 화목을 명하고 가쓰모토의 군사 행동을 비난하면서 요시나리에게는 가와치로 내려갈 것을 명하는 한편, 이세 사다치카에게 군을 인솔해 교토로 올라오도록 하는 등의 독자적인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6월 3일에 가쓰모토의 요청으로 쇼군의 아기(牙旗)가 동군에 내려지고, 쇼군 요시마사는 요시미에게 서군을 칠 것을 명했다. 6월 8일에는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이치조 오미야에서 야마나 노리유키(山名教之)를 쳐부수고, 나아가 요시마사의 항복 권고에 동요한 시바 요시카도가 자신의 집에 칩거하자 동군은 요시카네의 저택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남북으로 니조에서 고료노 가쓰지(御靈の辻)까지, 동서는 오오토네리마치(大舎人町)에서 무로마치까지 불탔다. 이때까지는 교토에 군세를 모으고 있던 동군이 우세했지만, 6월 14일에 야마토(大和)의 후루이치 다네나가(古市胤栄), 19일에 기이의 하타케야마 마사쿠니(畠山政國) 등 서군의 원군이 차례대로 도착하기 시작했고, 8월 23일에는 스오(周防)에서 오우치 마사히로(大內政弘)가 이요(伊予)의 고노 미치하루(河野通春) 등 사이고쿠(西國) 7개 구니의 군세 1만, 2천여 척의 수군을 이끌고 입경하면서 서군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날 천황과 상황이 무로마치정으로 파천하고 요시미가 교토를 빠져나와 기타바타케 노리토모(北畠敎具)를 의지해 이세로 달아났다. 이 시기를 즈음해 서군은 간레이 하지장을 통해 여러 군의 렌쇼(連署)에 의한 지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오우치 마사히로는 8월 중에 후나오카 산에 진을 치고 9월 1일에는 요시나리 · 아사쿠라 다카카게가 쳤던 다케다 세력을 축출, 다케다가 버리고 간 산보인(三寶院)에 불을 질렀다. 6일에 쇼군 요시마사가 거듭 요시나리의 가와치 하향을 명했지만 요시나리는 따르지 않았다. 18일에 교토 교외의 난젠지 산(南禪寺山)에서도 전투가 발생했고(히가시이와쿠라 싸움), 10월 3일에 발생한 쇼코쿠사의 싸움은 양군에 많은 사상자를 낸 격렬한 싸움이었지만 좀처럼 승패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소실된 쇼코쿠사 터에 시바 요시카도군이 진을 치고 요시나리가 야마나 소젠 저택 서쪽으로 옮기면서 동군은 열세에 몰렸다. 조정에 대해서는 10월 3일에 [[고하나조노 덴노|고하나조노 법황]]이 고후쿠지(興福寺)에 야마나 소젠의 추토를 명하는 치벌 인센(治罰院宣)을 내린 것 말고도 12월 5일(양력 12월 31일)에 오오기마치 산조 긴하루(正親町三条公躬), 하무로 노리타다(葉室教忠) · 미츠타다(光忠) 부자, 아노 스에토오(阿野季遠) ・ 시미즈타니 사네히사(淸水谷実久) 등 서군파로 몰린 구교의 관직과 작위 박탈이 결정되었다. 그들은 도미코의 친가인 히노 집안과는 대립 관계에 있던 산조 집안의 일족이나, 친척이 대부분 요시미를 지지하고 있던 구교들이었다. 오닌 2년(1468년) 3월 17일에 기타오지 가라스마루(北大路烏丸)에서 오우치 마사히로와 모리 도요모토(毛利豊元) ・ 고바야카와 히로히라(小早川廣平)가 교전하고, 5월 2일에 호소카와 시게유키가 시바 요시카도의 저택을 공격하거나 5월 8일에 가쓰모토가 소젠의 진을 치고, 8월 1일에 가쓰모토의 군사가 쇼코쿠사 터의 요시나리의 진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전투 장소는 점차 도성 밖으로 옮겨갔고, 야마시나(山科), 도바(鳥羽), 사가(嵯峨)에서 양군이 교전했다. 이 해에 요시카도는 막부와 적대하고 있던 간토의 아시카가 나리우지에게 화목을 제안하고 소젠과 요시나리가 연명으로 서명한 서신을 보냈다.[* 앞서 막부의 간토 정책의 일환으로서 시바씨의 당주가 된 요시카도였기에 나리우지와 막부의 화목이라는 성과를 올림으로써 가독에 간레이직의 확보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요시마사는 독단으로 화목을 도모한 요시카도를 7월 10일에 해임하고 가쓰모토를 간레이로 임명했으며, 요시카도의 가독 지위와 3개 구니의 슈고직도 마루오마루에게 넘겨버렸다.[* 서신을 보낸 달은 2월부터 3월로 추정되어 쇼코쿠사의 싸움의 뒤에 서군이 유리해진 상황에서 요시카도가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오닌 2년 9월 22일, 이세에 체재하던 요시미는 가쓰모토나 쇼군 요시마사의 설득으로 동군에 가담했다. 교토로 돌아온 요시미는 요시히사파(義尙派)의 히노 가쓰미쓰(日野勝光)의 배척을 요시마사에게 호소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나아가 윤 10월 16일에는 분쇼의 정변에서 요시미와 대립했던 이세 사다치카가 요시마사에 의해 정무에 복귀하고, 11월 10일에는 요시미와 친한 아리마 모토이에(有馬元家)를 살해하는 등 요시마사는 확실하게 요시히사 옹립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가쓰모토도 요시미를 옹립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출가를 진행시켜, 요시미는 재차 히에이 산으로 출가해야 했다. 11월 23일(양력 12월 19일), 서군은 히에이 산에 사자를 보내 요시미를 맞아들여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하고, 오오기마치 산조 긴하루, 하무로 노리타다 등도 이에 편입되어 서군은 '서막부'의 체재를 갖추었고, 요시미가 발급하는 문서에 의해 명령을 내리고 독자적으로 관위를 수여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동군의 '동막부'에서는 히노 가쓰미쓰, 이세 사다치카 등 요시마사 측근 세력이 커져서 분쇼의 정변 이전 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쓰모토로서는 요시미를 굳이 서군에 보냄으로서 소젠에 우호적이었던 히노 도미코를 막부 내에서 고립시키려 했었다고도 추측되고 있는데, 이후 가쓰모토는 서군과의 싸움을 거의 실시하지 않고, 대신 오우치씨와의 전투에 힘을 쏟았다. 이때 오우치 마사히로의 압도적인 군세 앞에 이미 교토가 있는 야마시로는 서군에 의해 제압되었고, 교토내에서는 산발적인 전투만 일어나는 대신 전장은 셋쓰(攝津) ・ 단바(丹波) ・ 야마시로로 옮겨가 있었다. 때문에 동군은 반오우치 활동을 부추겼는데, 분메이 원년(1469년) 오우치씨 집안의 중신으로 문무양도의 명장으로 알려져 있던 마스다 가네타카(益田兼堯)가 이와미(石見)에서 오우치를 배반하고 규슈의 오토모 지카시게(大友親繁) ・ 쇼니 요리타다(少弐頼忠)와 함께 오우치 마사히로의 숙부 노리유키(教幸)를 끼고 서군측의 오우치령에 쳐들어갔고, 분메이 2년(1470년) 2월에는 노리유키 본인이 마사히로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반란은 모두 오우치 집안의 스에 히로모리(陶弘護)에 의해 격퇴되었고 오우치 마사히로는 자신의 전력을 따로 끌어올 필요 없이, 7월 무렵까지 야마시로 전역을 서군이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리유키는 분메이 3년 12월 26일에 부젠에서 자결했다.] 이후 동서 양군의 싸움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길어진 전란과 도적의 발호는 몇 번이나 전화로 불타버린 교토를 더욱 황폐화시켰다. 교토에 상경해 있던 슈고 다이묘의 영토에까지 전란이 확대되어 다이묘들은 교토에서의 싸움에만 전념할 수가 없었다. 슈고 다이묘들이 그토록 얻고자 했던 막부 권력 자체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진 판에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차츰 동서 양군의 사이에는 전쟁을 혐오하는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